[뉴트갤리] If I were not (11)
2016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 등과 관련이 없습니다.
*양궁에 관해 지식이 없는 편입니다.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감기 몸살이네요."
갑자기 불려온 의사는 자연스럽게 단순한 진단을 내렸다. 뉴트는 조금 허탈해져서 헛숨을 켰다. 허. 탄성 같이 한숨을 내뱉자 의사가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감기 몸살로 갑자기 쓰러져?"
"열이 높은 데다 피로도 누적된 것 같으니까요. 일단 링거 맞췄고 해열제도 놓았으니 곧 나아질 겁니다."
"오랜만에 진료 봐서 실력이 녹슨 건 아니고?"
"주치의도 아닌데 진료 본 것만 해도 잘하는 겁니다."
의사는 투덜투덜 거리며 뉴트가 옆으로 접근할 수 있게 침대 옆으로 약간 비켜 섰다. 링거에서 포도당이 떨어져 아주 천천히 환자의 혈관으로 흘러들어갔다. 의사는 침대 옆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는 뉴트를 생소하게 바라보았다. 주치의가 된 지 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자신이 활동할 일은 별로 없었다. 건강 검진을 해서 몸에 맞는 영양제를 지어주고 비밀에 입을 다무는 정도였다. 고용주는 그렇게 자신의 건강에 철저했다. 이유는 알만 했지만, 어쨌든 의사가 월급을 받기 민망할 정도로 건강했다. 그러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데 갑작스레 불러서 와 보았더니 정작 진료해야 할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고 게다가 고용주는 옆에 버티고 서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서 웃기는 비유이긴 하지만 나름 아들처럼 생각하던 사람이 저러고 있는 것을 보니 의사는 흥미가 생겼다.
"그런데 피로로 쓰러지다니, 고생을 꽤 했나봅니다."
"......"
"이번 올림픽 국가 대표로 알고 있는데 꽤나 혹사한 모양입니다. 쉴 시간은 넉넉히 줬을 거 같은데."
"......"
"아, 그 전 스케줄이 빡빡했던 걸까요?"
"시끄러운데."
아하. 의사는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고용주는 저 남자의 고용주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꽤 사적인 방향으로도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방향이 아니면 자신이 불려올 일도 없긴 하다.재미있는 일이었다. 비서도 알고 있으려나. 모를 수 없긴 하지만. 고용주가 자신을 부른 것도 비서를 통하였으니까. 환자가 뒤척였다. 슬슬 정신이 들 모양이었다. 의사는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감기 몸살 정도면 당사자에게 전달할 것도 없다고 느꼈다. 본인이 말하게 하는 것도 재미있을 거고. 감기약을 봉지에 담에 옆에 두고 의사는 문을 나섰다. 손목시계를 정리하다가 문득 의사는 입맛이 써졌다. 손목에 있는 글씨에 자신이 지켜야 하는 비밀이 떠오른 탓이었다.
-
갤리는 목을 울리면서 깼다. 입이 말랐다. 뭔가 마시고 싶다기보다는 침이 없어서 혀가 뻣뻣햇다. 갤리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노력하며 물을 찾았다. 손이 뭔가에 감겨있었다. 어딘지 익숙한 감각이었다. 손이 무거워 들어 올리기가 힘들었다. 갤리는 눈을 아주 천천히 떴다. 손에 뭔가 끈 같은 것이 연결 된 바늘이 손에 꽂혀 그 위에 종이 반창고가 잔뜩 붙어있었다. 잊을 수 없는 첫번째 기억이 되살아나 갤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혹시-
"일어났어요?"
갤리는 그제야 뉴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 번 눈을 깜박이다, 몸의 긴장을 풀며 뒤로 기댔다. 아주, 혹시 모를 일이긴 하지만 첫날로 회귀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모두가 자신을 잊고, 그 날 그 황망한 그 순간으로. 뉴트를, 포함해서. 그제야 갤리는 감사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갑자기 쓰러졌으니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말할 것도 있다고 했는데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갤리는 입을 열었다.
"-."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목이 말라서인가. 게다가 꽤 아프기도 했다. 갤리? 뉴트가 당황해서 갤리를 불렀다. 갤리는 바늘이 꽂혀 있지 않은 왼손으로 물을 마시는 시늉을 했다. 뉴트가 곧 알아듣고 옆에 있는 탁자 위의 물병에서 물을 따라 주었다. 갤리는 입에 물을 머금었다가 조금씩 삼키는 방식으로 마른 입을 달랬다. 첫 모금에서는 목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지만 곧 익숙해졌다. 갤리는 몇 모금을 넘기고 나서 목소리를 내었다. 소리를 내자 어쩐지 자신의 걷이라고 하기에는 한층 더 가라앉고 갈라진 소리가 났다. 그래도 목소리가 나오긴 해서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기침, 많이 나오나요?"
"아뇨, 목소리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잠시만요."
뭐라고 말 할 틈도 없이 뉴트는 또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사 한 명이 문으로 들어왔다.
"좀 전에 진료 봤는데 또 그러신다."
"목이 아프다는데."
"아뇨, 그렇게 아프지는 않습니다."
의사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갤리의 입을 벌리게 했다. 쇠로 된 납작한 막대로 혀를 누르고 손전등으로 목 안 쪽을 비춰보더니 한 번 더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목이 좀 붓긴 했는데 그냥 드린 약 드시면 될 겁니다. 기침 나요? 아니죠? 물 많이 드시고. 이온 음료도 좋고요. 푹 쉬셔야 빨리 낫는 건 아시죠? 의사는 감기 몸살이란 처방을 한 번 더 내려주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다시 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약간 창피해진 갤리는 괜히 덮고 있던 이불을 쥐어 뜯었다.
방 안에 다시 침묵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갤리는 어색하게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자신의 방-그 쓰잘데없이 주어진 커다란 숙소에서 침실로 쓰는 방-만큼, 어쩌면 그보다 약간 더 컸다. 해외에 원정 경기를 갔을 때 썼던 호텔 방을 크게 키우면 이런 느낌이 될 것 같았다. 그 때도 협찬이 든든해 좋은 방을 썼다고 매니저가 상당히 들떠 있던 기억이 났다.
"저기."
갤리는 헛기침을 한 번 더 했다. 목이 여전히 잠겨있어서였다.
"그,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드셨을 텐데."
"아뇨,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별로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보다 많이 아프지는 않으신지 걱정도 되고요. 갤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많이 나아진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목이 잠겨 있는 데다 온 몸이 다 아파서 별로 설득력은 없었지만 어쨌든 말은 술술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의사를 부르려면 돈도 많이 들었을 텐데 나중에 매니저에게 카드를 받아서 돈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핸드폰."
"예?"
"제 핸드폰 어디 있죠?"
주머니를 뒤지자 핸드폰은 금방 나왔다. 밖으로 꺼낼 때부터 진동을 끊임없이 울려 대던 휴대전화를 갤리는 조금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한밤중까지 갤리가 숙소로 돌아오지 않아 걱정을 거듭하던 매니저는 갤리를 닦달했다. 갤리는 여기가 어디라고 정확히 말하지 못해 난감한 눈으로 뉴트를 바라보았다. 뉴트는 종이쪽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여기로 연락하라고 해요. 갤리는 적힌 대로 번호를 불러주었다. 매니저는 조금 당황하며 알겠다고 하고 기다리라며 전화를 끊었다. 갤리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내려놓았다. 뉴트는 조금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갤리는 뉴트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저."
"예."
"여기가 어딥니까?"
뉴트는 잠시 침묵했다. 이미 매니저에게는 밝힌 판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직접 말하자니 또 이상해질 게 뻔했다. 인턴 생활을 하는, 고학생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저냥한 대학생이라고 알고 있을 텐데 사실대로 근처에 있는 별장 중 하나라고 이야기 하자니 뭔가 앞뒤가 안 맞았다. 그냥도 이상했고.
"의사 선생님 댁입니다."
그래서 뉴트는 그냥 대충 둘러대었다. 들키지 않을 자신도 없지 않았다. 아예 그렇게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랬군요. 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크게 아픈 게 아니셔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얼른 나으세요."
"힘내겠습니다."
둘은 조금 웃었다. 대화가 뭔가 이상하고도 웃겼다. 웃다가 갤리는 기침을 몇 번 했다. 뉴트는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하고 밖으로 나갔다가 수프 접시를 받혀 들고 돌아왔다. 갤리는 어쩔 줄을 모르다 일단 나으시라는 뉴트의 말에 감사히 받아들었다. 수프를 몇 술 뜨다 다시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 갤리는 약을 입에 털어넣었다. 피로가 확실히 쌓여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졸자 뉴트가 갤리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문득 갤리는 뉴트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리고 자신이 깨어난 후로 그에 관해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면, 언젠가 다시 이야기 해 주겠지. 갤리는 수마 속으로 잠겨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