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D/메이즈러너

[뉴트갤리] If I were not (7)

ㄷㄷㄷㄷ 2023. 1. 26. 11:00

2016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 등과 관련이 없습니다.

*양궁에 관해 지식이 없는 편입니다.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인간의 단기 기억은 7글자를 30초 정도 기억할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여덟 글자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갤리는 시간을 천천히 늘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갤리는 열한 자의, 항상 반복되는 세 글자를 제외한 여덟 글자를 입속으로 끝없이 되뇌었다. 그러나 버튼을 누르는 손이 왜 그리도 덜덜 떨렸는지는 갤리도 모를 일이었다. 이름조차 제대로 적지 못하고 핸드폰에 번호가 저장되었다. 이름을 모르는 것도 있었고.

신호가 길었다. 전화를 아예 꺼두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오래도록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쁜 걸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그 말을 두어 번 듣고 나서 갤리는 한참을 손을 떨구고 시무룩하게 벤치에 앉아있었다. 머리를 털면서 라커룸으로 걸어들어온 동료가 혀를 찰 정도였다. 갤리는 땀에 흠뻑 젖어 꿉꿉한 몸을 이끌고 비척비척 숙소로 향했다.

찝찝하고 땀내가 나지만, 갤리는 공용 욕실을 쓸 수 없었다. 매니저가 죽어라고 신신당부를 한 일이기도 했다. 네임이 없다는 것은 그렇게나 큰 일이었다. 씻고 나오는 동료들을 봐도 허벅지에, 가슴팍에, 종아리에, 화장품을 치덕치덕 발라야 하는 목덜미나 얼굴까지. 다들 하나씩 서로 다른 글씨로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읽기 힘든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었고, 흔한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색깔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름(Name)이 있었다. 이 세계 어딘가에 같이 묶여있는 사람이. 갤리는 그래서 지친 몸을 이끌고 1인실에 들어가 딸려있는 욕실에서 몸을 씻어야 했다. 어느 누구도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유명 운동 선수의 기벽이려니 할 따름이었다.

뉴트는 그 시각에 탁자 앞에 앉아 일정한 박자로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검지 손톱이 원목 탁자에 부딪치며 타악기 마냥 울리는 소리를 냈다. 방금 전까지는 부딪치는 소리 대신 진동 소리가 방을 메우고 있었다. 일부러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따로 개통한 2g 폴더 휴대전화는 진동조차 온 방에 울릴 정도로 컸다. 그리고 영원할 것만 같던 진동은 방금 끊겨서 다시 울리지 않았다. 뉴트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화장품이 손끝에서 묻어났다. 꽃을 우려내 진하게 만든 것 같은 향이 손끝에서부터 풍겼다. 습관적으로, 혈색을 읽히지 않으려고, 옷을 조금 더 잘 어울리게 하기 위해. 

더 이상은 없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뉴트는 엄지와 중지, 검지를 맞비볐다. 꽃이 죽은 향이 풍겼다.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부재중 전화 2통. 녹색 버튼이 꾹 눌렸다.

-

카페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커피를 서빙해 온 카페의 주인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팔뚝을 걷고 네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안에서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 배우자인 모양이었다. 뉴트는 커피가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을 재고, 금액을 곱하다, 하루를 생각하고 그대로 그만 두었다. 이미 손해는 천문학적이었다.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일어난 일엔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탁자 위에는 재떨이가 하나 있었다. 뉴트는 담배를 좋아했었다. 몸을 망치는 맛과 매캐한 냄새를 좋아했었다. 관성적으로, 어쩔 수 없이 피운다고 말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뉴트는 담배를 좋아해서 피웠다. 그래서 뉴트가 이동하는 동선 어디에나 재떨이가 하나쯤은 놓여있었다. 주머니 속에도 물론 잘 씻은 휴대용 재떨이가 하나, 가끔은 두 개 들어있었다. 그래서 뉴트는 담배를 끊었다. 그러고 나니 세상이 조금 덜 지옥 같았다.

뉴트는 시계를 한 번 더 보았다. 바깥은 이미 해가 거의 져 있었다. 건물 아래에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관찰하기에는 그리 좋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열심히 달리고 있는 사람 정도는 구분이 가능했다. 천천히 산책하듯 걷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가 달려가고 있었다. 그 남자는 뉴트가 있는 카페와 연결된 건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뉴트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동안 남자는- 갤리는, 거기에서 잠시 굳어있었다. 뉴트는 머릿속으로 또 한 번 차트를 넘겼다. 고작 다섯 장 정도가 되는 차트가 다 넘어갈 즈음에 갤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테이블을 향해서 갤리는 걸어오기 시작했다. 걷는 법을 복습하는 사람처럼 아주 조심스런 걸음이었다. 갤리가 테이블가로 다 다가오기도 전에 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온 얼굴의 근육을 다해 생긋 웃었다.

"국가 대표 선수와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게 되어서 무궁한 영광이에요 갤리 씨."

갤리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잠시 침묵했다. 아뇨, 저야말로. 그 말을 꺼내기까지는 아주 잠깐의 시간이 걸렸지만 분명한 시차가 존재했다. 나무 의자가 나무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유난히도 컸다. 갤리는 우유가 많이 들어간 커피 한 잔을 의무적으로 주문했다. 음악 소리가 어색하게 침묵을 채웠다.

뉴트는 아무렇지 않게 아이스 커피를 한 모금 켰다. 침묵은 익숙한 것이었다. 아주 오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때도 있고, 기싸움일 때도 있지만, 어쨌든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뉴트는 침묵을 이기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백기를 들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례되는 줄은 알지만."

갤리가 불쑥 입을 열었다. 하얀 머그컵이 뜨겁지도 않은지 큰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여기 사십니까?"

뉴트는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리고 두 번째도. 그리고 지금이 세 번째라는 것을 머릿속에 각인했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고 눈초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어디 사는지가 중요하신가 봐요."

"...예."

상당히요. 갤리는 천천히 수긍했다. 뉴트는 잠시 차트에 그런 내용이 있는지를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그리고 답했다.

"그렇군요."

"......"

"전 여기 안 사는데."

인턴이라서요. 숙소만 얻었고. 갤리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뉴트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지역 차별 주의자라기엔 이 동네가 특별히 차별 받는 것도 아니었고, 갤리의 고향은 더더욱 아니었다. 갤리가 한결 밝은 어조로 입을 떼었다.

"그럼, 혹시."

그리고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에 억눌리기라도 한 것 마냥. 아주 잠시 뒤에 갤리는 모기가 우는 것보다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출신이세요?"

뉴트는 이제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붙든 주제에 정작 묻는 것은 시답잖았다. 여기에 사는지, 여기 출신인지가 언제까지 중요했으며 언제부터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는지 이미 기억도 나지 않았다. 뉴트는 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게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뇨. 아닙니다만."

"반갑습니다."

갤리가 거의 말을 잘라먹다시피 인사를 했다. 다급하다 못해 성급할 지경이었다. 갤리는 거의, 울 것 같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게 기쁨이라는 것을 아주 어렵게 알 수 있는 얼굴이었다.

"저도 그래요."

갤리의 컵을 쥔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저도 그래요. 갤리는 한 번 더 반복했다.

-

수행비서는 뉴트가 차를 탈 때까지 카페 근처에 차를 대고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날아드는 결재 서류를 분류하고 처리하고 쌓아놓는 일이 그나마 좀 줄어들 때 쯤에 차 문이 열렸다. 뉴트는 굉장히 피곤한 얼굴로 차에 탔다. 툭, 하고 둘 사이에 2g 폴더폰이 떨어져 내렸다. 수행비서는 끈기있게 기다렸다. 차가 출발하자 뉴트가 입을 열었다.

"위험하지는 않아. 하지만 이상한 놈이니까 사람은 계속 붙여 둬."

"알겠습니다."

진동 소리가 말 사이를 끼어들었다. 수행비서는 뉴트의 눈치를 보고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뉴트는 휴대폰을 흘끗 보았지만 별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문자였다. 몇 글자 되지 않는 언어가 전화의 기본 폰트로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다음에 또 봐도 될까요」

"이 휴대폰은, 해지할까요?"

이 일을 위해서 대강 아무렇게나 만든 휴대폰이었다. 더 이상 쓸모가 없다면 해지해도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저장된 번호도 없고, 통화와 문자 내역도 선수와 오간 것 외에는 없었다. 뉴트는 흘끗, 수행비서를 보고 손을 내밀었다. 비서는 놀라움을 숨기며 그 손 위에 전화를 올려주었다. 뉴트는 문장을 읽고 핸드폰을 덮었다.

"...일단 그냥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