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D/스타트렉

[스팍커크] 성장의 물약 (8)

ㄷㄷㄷㄷ 2023. 1. 26. 10:55

2016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 등과 관련이 없습니다.

 

커크의 수면 시간은 그 날 이후로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수면 시간이 변했다기 보다는 수면 시각이 변했다는 말이 더 옳았다. 양은 별로 줄지 않았지만 밤에 잠을 자서 그런지 질은 확연히 좋아졌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 되면서 스팍이 오는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오전 시간을 비끼는 시각으로 변했고 커크는 그런 스팍을 즐겁게 맞아주었다. 폐가의 일종이 아니냐고 불릴 만큼 상태가 안 좋았던 커크의 집도 그에 따라 나름대로 제 모습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대문에 나름 자물쇠도 달고, 천장만 달려있는 꼴이었던 헛간도 나름 창고와 차고의 중간 정도 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냉장고에도 그럭저럭 신선 식품이 차기 시작했다. 야직은 상시적인 건 양파와 양상추 정도였지만. 커크는 리플리케이터로 나름대로 조립한 잔디깎이에 시동을 걸었다. 한참 방치한 것 치고는 다행히 풀만 길게 자랐지 크고 뻣뻣한 잡목 따위는 없었다.

당연하지만 잔디깎이에서는 덜덜거리는 커다란 소리가 났다. 소음을 줄이는 방법을 모르는 커크로서는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일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개조를 추가로 하기도 또 뭣했다. 커크는 얼굴을 찌푸리고 잔디깎이를 앞으로 밀었다. 빠른 속도로 풀이 깎여나갔다. 종아리를 할퀴던 풀이 신발에 밟힐 정도로 짧아지는 것을 생경하게 지켜보다 커크는 누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었다. 스팍이 입을 뻐끔거리며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커크는 잔디 깎이의 시동을 껐다.

"부르지."

"현재 약 5회 정도 최대 성량으로 호명했습니다만 듣지 못하셨습니다."

청력에 이상이 생길 확률이 높은 소음이군요. 커크는 헛기침을 했다. 대문을 열고 나서 커크는 일단 잔디깎이를 창고로 치웠다. 어제 오전에 난리를 쳐 가며 내부 대청소를 해서 집 안은 깔끔한 편이었다. 티는 크게 나지 않았지만 스팍이 어느 정도 놀란 것은 확실해 보였다. 커크는, 비밀이지만, 아주 조금 뿌듯해했다. 

언제나 얻어먹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에 오늘 점심은 커크가 준비하기로 했다. 기껏해야 마늘과 버섯, 양파가 들어간 파스타에 식초를 친 샐러드 정도였지만 커크가 이 집에서 먹는 것이 캔 스파게티가 최대였던 것을 생각하면 나름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아직 커크는 이 일련의 변화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할 것 같은 꼬마가-실제로는 고등학생이긴 하지만-집에 찾아 온다는데 더러운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점심을 준비하며 커크는 스팍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 꼬마는, 전에 말한 적이 있긴 하지만, 자리를 권하지 않으면 도통 앉지를 않았다. 근처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 꽂혀있는 책장이 있었다. 내 책도 아니고 맘대로 읽어. 커크는 빈말처럼 허락하면서 냄비에 물을 올렸다. 스팍은 책등을 하나씩 훑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자연 과학에도 흥미가 있으십니까?"

"이번엔 그게 재미있어 보이길래."

그 전에는 철학, 또 그 전에는 심리학, 또또 그 전에는... 커크가 빌려오는 책은 갈수록 전문성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장르도 제멋대로가 되어 갔다. 심지어 가끔은 논문집까지 끼어있었다. 스팍은 적당한-물론 고등학생이 읽는다고 보기에도 난해하고 어려운데다가 두껍기까지 한-책을 한 권 골라 탁자에 올린 후 자리에 앉았다. 커크는 냄비에 면을 집어넣고 팬을 불 위에 올렸다.

스팍은 표지부터 한 장 씩 책을 넘겼다. 간간히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그와 같이 도마와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면이 다 익기 전에 나머지 재료를 볶고 면을 집어넣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소금과 올리브 오일로만 간을 한 파스타는 벌칸에게도 무해한데다 괜찮은 맛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식초와 역시 올리브 오일로 간을 한 양상추 샐러드도 마찬가지다. 커크가 굳이 이 메뉴를 고른 이유기도 했다. 모양을 내지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접시에 담은 뒤에 커크는 접시를 식탁으로 가져갔다. 스팍이 보던 책은 이미 챕터를 두 개쯤 넘어가 상당한 페이지를 이루고 있었다. 스팍은 가름끈을 끼워두곤 책을 한 쪽으로 치워 접시를 받았다. 커크도 곧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고민 같은 거 있어?"

스팍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유난히도 빠르고 정기적이었다. 소리만 들었을 때에는 커크도 자신의 착각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접시를 가지고 올 때 보니 스팍은 그닥 책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팍의 얼굴이 연녹색으로 물들었다. 약간은 창피한 모양이었다.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하는 것은 무례하고 비위생적인 행동입니다."

"아직은 식사 시작 전이잖아."

스팍은 잠시 더 침묵을 지키다가, 커크가 끝끝내 포크를 들지 않자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미스터 커크, 혹시, 벌칸 사이언스 아카데미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

스팍을 집에 들여보내고 커크는 웃는 표정을 지우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칸 사이언스 아카데미라. 아에 듣도 보도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관심이 있냐고 물으면 사실 부정의 표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까는 대충 둘러대며 넘어갔지만 사실 함의는 분명했다. 지구에 벌칸이 있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인데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곧 벌칸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학교야 뭐, 졸업을 했던 교환 학생으로 잠시 온 것이건 알 방도는 없었지만 어떻게든 해결을 보았을 것이고.

우주라. 목적지는 그 너머에 있지만 커크는 그 과정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어둡고, 광활하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도, 그러지 못하기도 하고, 그리고- 커크는 눈을 비볐다. 뭐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커크가 자주 느끼던 감각이었다. 정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거기에 지나치게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주 최근에 이르기까지 떨치지 못하고 머릿속 한 켠 어딘가에 깊이 담겨있던 그런 감각이었다. 다시 돌아가게 되는 건가. 너도, 나도. 커크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보았다. 해가 거의 다 저문 아이오와의 밤하늘에는 오늘 따라 구름 한 점 없이 별이 수북히도 박혀있었다. 우주라. 우주 여행이라. 스타 플릿이라. 여기저기 가지를 치고 뻗어가는 생각을 걷어내기 위해 커크는 스팍이 떠난다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떠나게 되면, 다시 지구에서 볼 일이 있을까? 벌칸은 모성을 잘 떠나지 않는 종족이라고 했다. 아마 무리겠지. 벌칸 사이언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지구에 들릴 일이 있다고 해도 지금처럼 넉넉하게 쉬려면 꽤나 나이를 먹어야 하니 시간이 더 걸릴 것이었다. 사렉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편이었고, 벌칸은 인간보다 나이를 느리게 먹는다. 인간의 수명도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벌칸을 따라가려면 정말 한참이나 멀었다. 사렉 수준으로 나이를 먹은 스팍이라니. 진지하게 생각하던 와중에 커크는 풋 웃어버리고 말았다.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마 그 이전 즈음에 커크는 죽을 확률이 더 높았으니까.

확률 운운하는 걸 보니 스팍과 오래 있긴 했던 모양이다. 커크는, 다시 말하기도 입 아프지만, 인간이었고, 게다가 그닥 생활 패턴이 괜찮은 편도 아니었다. 인간으로써도 오래 살기는 어렵지 않을까? 대도시에 나갈 생각도 적었고, 나간다해도 고위층으로 보이는-이 먼 데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스팍이 자신을 만날 수 있을 만큼 한가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까- 커크가 스팍을 다시 만날 확률은, 아무리 좋게 말한다고 해도 괜찮다고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기껏해야 '가능성이 없지는 않네.' 수준이었다.

꿈이 오래 갈 리는 없고, 휴식도 언젠가 끝을 맺기 마련이다. 커크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대강의 일정을 되새겼다. 사실, 일정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커크는 바이크를 세우고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더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얼마 안 있어 아만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아만다가 약간 놀라는 소리를 냈다. 커크는 미소 짓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아만다에게 말을 건넸다.

"저희 집에 한 번 초대 드려도 괜찮을까요? 세 분 다, 하루 정도만."

기껏해야, 떠올려 봤을 때 그럭저럭 괜찮은 추억을 하나 만들어 주는 정도 밖에 커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