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팍커크] 성장의 물약 (7)
2016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 등과 관련이 없습니다.
커크는 자주 가던 샌드위치 집으로 스팍을 데려갔다. 따끈하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치즈를 듬뿍 녹여 넣은 햄버거나, 파삭파삭하게 튀긴 어니언 후라이가 특히나 평이 좋은 곳이었다. 커크는 여기에 반주-라기보다는 음료수의 개념으로-로 차갑게 살얼음이 낀 병맥주를 한 잔 씩 끼워서 시키곤 했다. 비록 오늘은 교육용으로 좋지 않아서 약간 무리가 있긴 했지만.
오늘은 소프트 드링크나 마셔야겠네. 커크는 메뉴판을 스팍에게 건네며 생각했다. 패스트푸드점은 아니지만 비슷한 주문 구조를 가지고 있는 탓에 둘 다 서 있는 상태였다. 아까 바이크에서 힘을 상당히 주고 있는 것 같던데 힘들진 않을까? 커크는 메뉴판을 거의 해체할 듯이 뜯어보고 있는 스팍을 바라보았다. 메뉴판을 보면서 저렇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 말이지. 커크는 영혼 없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는 캐셔의 눈 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핑거 스냅에 놀랐는지 아가씨의 눈이 동그랬다. 스팍이 고개를 드는 것 같았다.
"상냥하신 숙녀 분, 여기서 애들한테 제일 잘 나가는 메뉴가 뭐에요?"
"아. 이 쪽의 치킨 너겟이나, 미니 버거랑 탄산음료로 구성되어 있는 세트메뉴가 제일-"
"둘 다 불가능합니다."
스팍의 침착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커크는 스팍을 내려다보았다. 스팍은 판매대 위에 메뉴판을 다시 올려 놓고 있었다. 어? 커크가 반문하자 스팍이 이쪽을 흘끗 올려다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바로 해 직원을 바라보았다.
"벌칸은 육류를 섭취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당은 적정 연령 미만의 벌칸이 섭취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성분입니다. 둘을 배제한 식단을 소개해 주시는 것을 선호합니다."
"오, 그러니까."
직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메뉴판을 한 번 뒤집었다. 그리고는 맨 밑에 있는 샌드위치를 손으로 짚었다. 여기 채식주의자를 위한 샌드위치가 있는데 이거랑, 당뇨가 있는 사람을 위한 무설탕 차가 있는데요. 커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것을 추가해서 부탁한다고 했다. 주문을 받은 점원은 자리로 가져다 주겠다고 말했다. 커크와 스팍을 식당 한 켠의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커크는 테이블에 팔을 괴고 가방을 내려놓는 스팍을 바라보았다. 통통한 뺨에 약간 녹색이 깃들어 있었다. 아마 혈색이 좋은 거겠지.
"고기 못 먹어?"
"섭취하지 않습니다.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못 먹는 건 아닌데 안 먹는다는 건가. 설탕은 또 못 먹고. 외계 입맛이라 그런지 식습관이 많이도 달랐다. 좀 알아봐야 하나. 이래저래 못 먹는 걸 모르고 있으면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나와야 하는 당황스런 상황이 생길지도 몰랐다. 직접 물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아마 편식은 하지 않을 테니 벌칸에 관한 서적 몇 권만 찾아봐도 괜찮을 것이었다. 나중에 한 번 더 물어봐야지 그리고. 그쯤 생각을 하고 있자 음식이 나왔다. 탄산음료와 차갑게 식힌 차는 유리컵에 담겨 나왔고 샌드위치 두 개는 체크 무늬 냅킨에 예쁘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넓은 접시에 어니언 후라이가 작은 언덕처럼 담겨있었다. 커크는 쟁반을 받아 들고 자연스럽게 스팍에게 몫을 주었다. 어니언 후라이를 찍어 먹을 소스를 짜내고 나서야 스팍이 약간 불퉁하니 전혀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팍?"
"....."
"여기 꽤 맛있는 집이야. 그렇게 경계 안 해도 되는데."
"불특정 다수를 향해 유혹을 하는 것은 지구의 윤리에는 알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
유혹? 무슨 유혹? 내가? 지금? 그야 꼬신 적은 많다. 여자를 유혹해본 것도 손에는 당연히 다 꼽을 수 없는 횟수고 성공률도 나름 괜찮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지금? 지금 유혹 같은 걸 한 기억은 없는데? 립서비스는 좀 했지만...
"벌칸은 유혹의 기준이 낮아?"
"인간의 기준으로도 유혹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니 방금 그건 그냥 칭찬이고."
"유혹입니다."
스파은 결벽증 비슷한 게 있는 게 아닐까. 벌칸들의 윤리까지 한 번 알아봐야겠다고 커크는 속으로 깊은 한숨과 함께 다짐했다. 이러다 전부 알아보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래도 일단 시간은 점심시간이고, 심지어 그 시간마저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커크는 일단 스팍의 식사를 우선하기로 했다.
"알았어. 일단 점심 먹어."
"주의를 요망합니다."
"알았다니까."
커크는 스팍의 앞으로 접시를 밀어주었다. 그제야 스팍은 식기를 집어들고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커크도 그제야 버거를 집어들 수 있었다. 어째 스팍의 무표정이 만족스러워 보여서 커크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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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롭게 밖으로 나온 김에 집에 보내줄 때까지는 밖에서 돌아다니려 하였으나, 스팍이 아는 곳은 유희보다는 학업에 집중되어있었고-학교 외에는 드물다는 이야기다-커크가 아는 곳은 아직은 어린 스팍을 데려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심지어, 어쩌면 불법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상가를 제외하면 이 작은 시골은 건물조차 드물었다. 그나마 이쪽이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라 사람이 좀 다니고 건물도 많은 편이긴 했다. 그래 봤자긴 했지만. 둘 다 갈 수 있는 그럴듯한 공간 중 근처에 있는 곳은 도서관 정도였다.
공립 도서관이라 책장은 커크의 시야보다 약간 아래 높이에 있었고, 오래된 책장은 나무로 짠 데다가 약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자주 찾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옛날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리플리케이터로 만든 플라스틱이나 철판으로 짠 책장이 대부분인 때지만 온기에서는 나무로 짠 것이 더 좋았다. 약간 차갑다가도 체온을 받아 다시 따끈해지는 그 촉감은 다른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건 종이책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장서량은 전자책이 월등하다곤 하지만 오래된 도서관이니만큼 종이책도 만만치 않은 장서를 자랑했다. 커크가 벌칸에 관한 서적을 몇 권 집어온 사이 스팍은 약간 얼굴을 녹색으로 물들일 정도로 기분을 좋아하면서 백과사전만큼 두꺼운 책을 몇 권이나 집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도서관에 데려오길 잘 한 것 같았다. 커크는 잘 한 선택을 기뻐하며 스팍의 맞은 편에 앉았다. 책상은 낮았고, 사람이 없다시피한 작은 도서관은 책장 넘어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여기 온 게 얼마만이더라. 한 때는-그러니까 독립하기 전에는 여기서 살다시피 했던 기억도 있었는데. 약간은 집에서 도피하려는 목적도 없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 온기에 위로를 받은 적도 몇 번이나 있는 것 같았다. 벌칸에 관한 책은 게다가 흥미로웠다. 열심히 들었던 외계 종족에 관한 개관 과목을 다시 듣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 오래 되어 잊혀진 안정된 기간이 다시 떠오르는 그 기분이 커크는 못내 어색했다. 아니, 그 때보다 더, 훨씬 다정하고 따뜻한 시간이 처음이었으므로, 커크는 그 안에 푹 잠겨 있다가도 문득문득 어색함을 느끼곤 했다. 잘못 맞춰진 퍼즐 조각을 보는 느낌의 객관화가 일순간에 커크를 엄습하곤 했다. 그러나 그 온기를 떠날 수 없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커크는 짙은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수 밖에 없었다. 가끔 스팍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흘끗흘끗 확인을 해 가며 책을 읽어내렸다.
어린 아이는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며 궁금증을 풀어내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흥미와 기쁨을 농축한 것 같은 눈동자가, 갈색인데도 눈이 부셔서 커크는 굉장히 부럽다고 생각했다. 저런 눈동자를 자기도 언젠가 가졌던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 커크는 스팍을 집에다 바래다 주었다.-여전히 바이크를 탈 때 스팍은 긴장을 놓지 못했다-그리고 오는 길에 도서관을 한 번 더 들려서 몇 권이고 책을 뽑아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다. 회원증을 만들고 원하던 것, 좋아하던 주제를 몇 권이나 빌려서 커크는 정말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수마에 져서 곯아 떨어지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기쁘지 않았냐고 물어본다면, 고개를 저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다음날도 스팍은 커크 집의 문을 두드렸다. 커크는 흘러내린 침과 책을 대강 정리하고 정신을 차려서 문을 열었다. 미스터 커크, 하고 부르는 아이의 손에는 차와 비스킷 대신 차를 우리는 법이 꼼꼼히 적혀있는 종이와 신선한 사과와 두툼한 샌드위치가 들어있는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커크는 배가 아플 정도로 웃을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