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D/메이즈러너

[뉴트갤리] If I were not (2)

ㄷㄷㄷㄷ 2023. 1. 26. 10:52

2016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 등과 관련이 없습니다.

*양궁에 관해 지식이 없는 편입니다.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신입 비서는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오는 서류들을 정리하며 닫힌 문 너머로 눈치를 보았다. 이래저래 일이 많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이 정도로 많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매년 몇 명씩 그만 두고 나간 다는 게 농담으로는 결코 들리지 않았다. 지난 몇 년 간 끝없이 같이 다니는 수행 비서가 그저 대단해 보였다. 모두들 쉬쉬하고 있는 그 소문이 사실일까 생각하다 신입 비서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털어버렸다. 생각해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였다. 혹여라도 입 밖에 내는 순간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 뒤에서 서류를 들고 나온 다른 비서가 탁자 위에 서류를 내려두었다. 두툼한 서류 뭉치가 신입 비서에게 돌아왔다. 비서는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보부에서 올라온 자료였다. 양궁 선수였고, 이름란에는 갤리라고 적혀 있었다.

뉴트는 서류를 넘겼다. 다음 분기에 어떤 선수에게 협찬할 지 정하는 안건이었고, 몇 번이나 검토 회의를 한 사안인지라 그리 대단하게 검토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뉴트는 서류를 처음 보는 것처럼 처음부터 꼼꼼히 검토하고 있었다. 근 몇 년 간, 뉴트는 마치 일 중독에 걸린 것처럼 굴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마냥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회사일에 매달렸다. 옷이 날마다 바뀌는 것으로 보아서는 퇴근을 하는 것이 확실하지만, 출근하는 것도 퇴근하는 것도 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심지어 매일 같이 쏟아지는 파티 초대장에 손수 거절하는 답장을 써 보낼 정도였다. 본래도 파티를 잘 나가지 않는 편이긴 했지만 요새는 특히 드물어진 데다, 들어오는 얘기까지 뜸해질 정도로 뉴트는 사장실에만 처박혀 나갈 줄을 몰랐다. 잠시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박거리다, 뉴트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 선수."

"예, 사장님."

수행 비서가 말을 받았다. 뉴트는 글자를 몇 번 더듬듯이 훑고는 피식 피식 웃었다.

"이상한 소문이 있는데."

"....."

"재미 있네."

흔할 리 없는 소문이고, 세상에 들어본 적 없는 소문이기도 했다. 역사에 기록조차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이렇게 쉽게 나돌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관련 된 일은 아닐 겁니다."

"글쎄."

"....."

"어떨까."

뉴트는 만년필을 집어들었다. 검은 잉크가 잔뜩 든 만년필은 자연스럽게 예쁜 필기체를 뽑아냈다.

"협찬하는 김에 연락이 지속적으로 들어오게 해."

"예."

"악의적인 얘기면 묻어버리고."

수행비서는 잉크가 마르도록 잠시 내버려 두었다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두꺼운 서류 드문드문 박혀있는 /노 네임/이라는 것이, 농담이라기엔 꽤나 지독했다. 뉴트는 목덜미를 짚었다. 거기에 분명히 있었던 어떤 것이 있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

갤리의 하루는 단순한 편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기상해서 그 날의 몫으로 정해진 운동을 한다. 대부분 하루 종일이 걸리지만 그보다 일찍 끝날 때도 많다. 갤리의 경우는 특히 더 그랬다. 몇 번이나 더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가를 수십 번씩 테스트해 본 후에 쉬는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물론 그에 맞추어서 몇 번이고 준비 운동을 해서 몸을 풀어주어야 했지만. 몸이 좋건 나쁘건, 비가 오건 말건 그 날짜에  사냥을 해야만 했던 갤리로서는, 움직이지도 않는 대상물을 맞추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버지가 갤리에게 활을 가르칠 때에는 어렵고 배우는데 오래 걸리는 것을 가르친다며 비웃음이 많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 일이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 적응하기는 꽤나 어려웠을 테니까.

사실 갤리는 아직 이쪽에 적응했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얇은 종이 쪼가리가 황색을 띄는 동전보다 더 비싼 값을 한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고 네모나고, 심지어 건네주지도 않는 딱딱한 쪼가리가 돈과 비슷한 가치를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쓸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었고, 갤리의 매니저는 갤리가 가산을 탕진하는 것을 우려해서 한도를 상당히 낮게 잡아두었다. 갤리가 벌어들이는 상금이나 협찬 받는 비용이 적은 양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기는 했다. 현대에 어리숙한 갤리는 사기 따위에 걸려들기가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그러나 사실 갤리는 현금을 쓰는 것에 훨씬 더 익숙했기 때문에 카드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침대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푹신했고, 이불은 굉장히 따뜻했다. 가끔 온갖 기계들을 볼 때마다 갤리는 깜짝깜짝 놀라고는 했다. TV를 보는 것마저 익숙해지기까지는 몇 달을 넘게 걸려야 했다. 자연스럽게 행동한다는 것은 갤리에게 꽤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화를 받는 것만 해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갤리의 휴대전화는 오로지 전화를 걸고 받는 기능만 있는 것이었다. 아예 안 붙여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기능이 최소화 된 것으로 산 것이었다. 몇 년이고 지나는 동안 갤리는 간신히 거기까지 적응할 수 있었다. 쾌거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적응이기는 했다. 적은 인간관계와 전문성을 살린 것에 대한 대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고, 그 덕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화살이 또 한 번 10점을 찍었다. 10점 라인 안에 거의 빽빽하게 찍힌 화살을 제거하려 잠시 쉬는 시간이 돌아왔다. 같은 팀의 선수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갤리는 무시했다. 챙길만한 여력도 없었다. 등줄기가 땀으로 흠뻑 젖어서 목이 말랐다. 약간 찝질한 맛이 나는 이온음료는 약간 중독성 있는 묘한 맛이 있었지만 갈증을 풀기에는 제격이었다. 계단을 시끄럽게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서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갤리의 매니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 갤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표정이 굳었다. 얊은 종이를 쥐어잡고 뛰어들어온 매니저는 상기된 표정을 하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 쪽 귀퉁이는 손에 찬 땀 때문인지 약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후원이 들어왔어!"

매니저가 거의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외쳤다. 갤리는 매니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 결국 갤리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고로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예? 하고 되물어야 했다. 매니저는 갤리가글고 있는 음료수 병을 가리키며 지금 네가 들고 있는 그 음료수! 하고 다시 외쳤다.

"이게 왜요?"

"그 회사에서 널 후원해 주겠다고 했다고! 월급까지는 아니지만, 옷이라든가, 활 비용이라든가 하는 것들!"

갤리는 한결 더 얼떨떨해진 얼굴로 음료수병을 내려다 보았다. 그렇게 비싼 비용은 아니었지만, 어떤 곳을 가든 파는 음료수는 그 종류가 적다는 것 쯤은 슬슬 깨달아가고 있었다. 이 음료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런 음료수를 만드는 회사를 대기업이라고 부른다는 것 정도는 갤리도 슬슬 배워가는 중이었다. 자신과는 연이 없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매니저는 갤리를 끌고 밑으로 내려갔다. 수근거리는 소리가 한 톤 더 높아지는 게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면 거기는 자회사고, 그냥 그 음료수를 만드는 기업의 모회사야. 훨씬 더 크고, 사실 아무도 운동선수에게 협찬한다는 건 몰랐는데- 네가 뽑혀서, 지금 나도 좀 얼떨떨한데."

"자... 뭐요?"

매니저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보다 훨씬 더 큰 회사라고."

"아."

매니저는 약간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공식적으로 갤리는 아주 깊은 시골에서 아동 학대 비슷한 것을 받다가 세상에 나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사실과는 좀 거리가 있는 내용이었지만, 갤리가  뭐라고 설명을 하지 못하는 사이 매니저도 코치도 그렇게 믿기 시작해 버려서 갤리는 그냥 그런 것으로 해 둘 수 밖에 없었다. 설명하는 것도 무리기도 했고. 매니저는 금방 표정을 수습하곤 갤리에게 다시 설명했다.

"사실 너한테 안 좋은 소문이 돌아서 협찬 같은 게 안 들어 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하긴 네임이 실력에 상관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믿기는 했지만- 매니저는 거의 정신이 없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몇 년이나 지났지만 갤리는 도통 그 네임이라는 것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이쪽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의미가 크다는 건 알겠지만 왜 그게 없다는 게 이상한 의미가 되는 건지 갤리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매니저가 입을 다물게 하는 탓에 다물고는 있지만, 갤리는 여전히 이 세상이 어려웠다. 네임도, 네임을 찾는 사람들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갤리는 매니저가 설명해주는 대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그 날 부로, 갤리의 숙소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