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팍커크] 성장의 물약 (6)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 등과 관련이 없습니다.
대국은 커크가 이겼다. 스팍이 아주 정석적인 방법으로 진행했던 탓이었다. 체스 경력의 길이 자체는 둘 사이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커크는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 체스를 둘 만한 변변한 기회를 갖지 못했으니까. 집에 체스 세트가 구비해두지 않았기도 했고, 체스를 둘 수 있는 곳에 들른 지도 오래 되었다. 오랜만에 체스를 두면서 커크는 자신이 체스를 좋아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스팍은 표정을 없애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그래도 승부욕을 다 지우지 못했는지 볼이 약간 굳어있는 것 같았다. 물론, 커크의 착각일 수도 있다. 아만다가 웃음을 지우지 못하는 걸로 보아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지만.
사렉이 무인 택시를 호출할 때까지 스팍은-비유적인 표현으로-땡땡 부어있었다. 어른스러워지려고 노력은 하지만 역시 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커크는 화를 풀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스팍은 그저 "벌칸은 화내지 않습니다."라고 딱딱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래. 화내지 않겠지. 커크는 그냥 웃었다. 어른의 포용력은 이럴 때 쓰는 법이다. 사렉이야 말로 정말 스팍의 투정을 너그럽게 받아주고 있는지 다만 손님이 있어서 돌아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감정이 없다는 건 저 표정이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커크는 아만다가 타서 건넨 커피를 대단히 감사하며 마셨다.
스팍의 분노는-당사자는 분노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커크가 무인 택시를 타기 직전에야 풀렸다. 아까보다 한결 유연하지만 그래서 더 시무룩해 보이는 무표정으로-키가 작아서 내려다 보이니 더 시무룩해 보이는 걸 수도 있었다.-스팍은 커크에게 중지와 약지 사이를 가른 오른손을 들어보이며 인사를 했다. Live long and prosper. 앞으로 영영 못 볼 것 같은 느낌의 인삿말에 커크는 피식 웃었다.
"학교 끝나고 질문할 거 있으면 내 집으로 와도 돼."
커크는 눈을 깜박이는 스팍에게 선뜻 말했다. 어머, 하고 아만다가 탄성을 했다. 사렉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 커크는 어깨를 으쓱 움직이며 내가 아는 건 그리 많지 않지만, 하고 뒷말을 덧붙였다. 쉽게 말하면 놀러 오라는 거지. 스팍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커크를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아 근데 학교 끝나고 와."
학교가 끝나면 한두 시는 넘을 테니 그 쯤이면 아무리 늦게 일어나는 날이라도 저도 깨어 있겠지. 혹시 모르니 과자 정도는 손님 대접용으로 사 둬야겠고. 커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택시에 탔다. 정말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좋은 친척'의 모습을 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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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은 해 뒀고, 그런 마음을 먹기도 했지만, 이럴 줄이야 생각하지 못했다.
"초대에 응해서 왔습니다. 이건 어머니가 전해 달라고 하신 선물입니다."
커크는 까치집도 채 부수지 못한 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기며 잠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이건 꿈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비몽사몽 상태면 꿈도 마치 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커크는 눈을 비볐다. 그러나 눈 앞에 하얀 종이로 된 쇼핑백을 내밀고 서 있는 쪼그마한 벌칸 꼬마는 도통 사라지지를 않았다.
"각막에 손상을 주실 생각이라면 비효율적입니다. 게다가 건강 및 미관 상 좋지 못합니다."
"아니 잠이 덜 깬 것 같아서."
"오후가 된 시각까지 수면을 취하고 잇는 것은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커크는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한 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고등학교가 원래 이렇게 빨리 끝났나? 졸업한 지 꽤나 지났다 보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일찍 끝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학교 빼먹고 온 거야 설마?"
"시험 기간입니다."
사흘 간 기말고사가 진행됩니다. 커크는 오른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벌써 시즌이 그렇게나 되었나. 여름이 가깝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벌써부터 이렇게 학교가 일찍 끝날 줄은-아니. 커크는 생각했다. 요 꼬맹이가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게 알맞았다. 일주일은 있다가 오기 시작할 줄 알았는데. 초대를 한 게 어제인데 벌써 오다니. 벌칸은 원래 다 이런가? 커크는 찝찝하게 생각하며 스팍을 집 안으로 초대했다. 어제 자기 전에 세탁기도 돌리고 하느라 정리를 좀 해서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그 전날보다 더 지저분한 꼴을 보일 뻔했다. 청소기도 돌릴 걸 그랬나. 커크는 뒷덜미를 긁었다.
하얀 봉투 안에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워터크래커와 시음용으로 보이는 티백 몇 개가 앙증맞은 봉투 안에 분리되어 담겨 있었다. 차를 좋아하시나 보네. 커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강 찬장에서 잔을 몇 개 꺼냈다. 이번에는 줄 수 있는 게 단순히 끓인 물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앞으로 차나 커피 같은 걸 사 둬야 하나. 하다못해 리플리케이터 공식이라도 알아둬야 할 것이었다.
앉으라고 권하지 않았더니 스팍은 들어온 자리에 그대로 붙박여 서서 방 안을 조금 둘러보고 있었다. 채광이 좋은 편이긴 하지만 불을 켜지 않아 어둑한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스팍을 보다 커크는 커튼을 조금 더 걷었다. 아직 낮이니 불을 켤 필요까지는 없겠지. 커크는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서인지 스팍이 테이블 쪽을 돌아보았다. 앉아. 커크는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스팍이 종종 걸어와서 의자 위에 앉았다. 방석이라도 하나 놓아야하나. 커크는 복잡한 기분으로 찻잔을 내밀고 커크는 스팍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가- 곧 뱉었다.
이게 원래 이런 맛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커크는 한없이 떫은 차가 가득 담긴 잔을 노려보았다. 혀를 닦아내고 싶을 정도로 쓰고 떫은 맛이 났다. 원래 이런 맛이라고 해도 일단 먹을 만한 게 못 되는 것 같다. 커크는 제 몫의 차를 치우려 하다 문득 스팍을 바라보았다. 스팍은 찻잔을 쥐고 안쪽에 있는 차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것이 이렇게 떫은데 스팍의 것이라고 해서 멀쩡할 리가 없었다. 커크는 한 손으로 스팍의 잔 위 쪽을 둘러 잡았다. 스팍이 고개를 들었다.
"마시지 마. 맛 없잖아."
"......"
거짓말을 못하다 보니 부정은 못하는 모양이었다. 스팍은 컵을 꼭 쥐다시피하고 놓지 않았다. 힘이 더 세서인지 스팍이 쥐고있는 찻잔을 위로 들어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못해 불가능했다. 커크는 다급하게 말을 붙였다.
"컵 깨지겠다."
"...이 정도 압력으로 파손될 확률은 5.3% 이하입니다."
"그치만 네 손이 다치겠지."
"그 말씀은 타당하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팍은 컵을 놓지 않았다. 이걸 얼른 치워야 하긴 할텐데. 아무리 봐도 몸에 좋은 맛은 아니었다. 쓰고 떫고 향도 약했다. 우리는 방법 같은 게 따로 있는지도 몰랐다. 적어도 손님에게 줄 만한 것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커크는 약간 고민을 하다 찻잔에서 손을 떼고 스팍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몸을 씻고 옷을 갖춰 입고 나왔다. 갖춰 입었다고 해도 청바지에 티셔츠가 다기는 했지만. 스팍은 찻잔을 여전히 꼭 잡고 식탁 앞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옆에서 보자니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상태였다. 내려놓으라고 안 했다고 지금까지 안 내려놓은 건가. 조금 골치가 아프기도 했다. 스팍. 커크가 부르자 스팍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커크는 입을 열었다.
"점심 먹으러 나가자."
집에 있는 냉장고를 뒤져볼 필요도 없었다. 그 안에 맥주 외의 음식을 넣은 것이 언제적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대부분 나가서 사 먹을 뿐 아니라 잘 먹지도 않으니까. 스팍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집 안에 먹을 거 없어. 나가야지 뭘 먹지. 커크는 자연스럽게 스팍에게서 컵을 빼앗아 싱크대에 던져넣다시피 했다. 당했다 싶었는지 스팍이 다시 커크를 올려다 보았지만 커크는 모르는 척 애교 부리는 미소를 지었다. 스팍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바닥으로 내려섰다.
"매식(買食)은 그리 권장되는 행위가 아닙니다."
"혼자 살면 어쩔 수 없을 때가 많으니까."
커크는 종종 걸어나가는 스팍의 뒤를 반 걸음 차이로 쫓으며 스팍을 앞으로 나아가게 재촉했다. 그리고 잠시 후, 교통수단이 커크의 에어 바이크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스팍은 못 박힌 듯이 제자리에 멈춰 섰고 커크는 그런 스팍을 다시 달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