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팍커크] 성장의 물약 (4)
2015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 등과 관련이 없습니다.
커크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좋은 집 꼬마의 부모님과 엮여서 생길 수 있는 좋은 일은 커크의 머릿속에서는 많지 않았다. 물론 이미 어머님과는 마주했고, 후하게 식사 비슷한 것을 대접 받는다는 좋은 일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정말 드물게 좋은 일이었다. 뒤끝도 무엇도 없는 깔끔한. 그 이상을 이어갈 생각도 마음도 커크에게는 없었다. 옷을 대강이나마 갈아입은 뒤에 커크는 그 사안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않으려 했다. 커크가 대답을 회피하려 하자 꼬맹이는 꾸준히 '저녁 식사의 초대에 응해주십시오.' 따위의 말로 압박을 가해오고 종국에 '대답을 회피하려는 행동은 논리적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않았다면 그냥 저냥 애만 차에 태워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한심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커크는 그랬다. 결국 커크는 대강의 옷차림을 하고 우아한 검은 빛이 도는 차를 향해 문밖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꼬맹이를 맞이하기 위해 우산을 들고 차에서 내린 벌칸은 철저하게 무표정했다. 어린애와 어른의 차이인지, 꼬마는 무표정하려고 애를 쓴다는 느낌에 녹색이긴 하지만 혈색이 조금씩 변화하는 편이었으나-볼이 녹색으로 달아오른다던가, 약간 창백해지는 것 같은-그 아버지는 그런 변화도 쉽사리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스팍."
"아버지."
아, 얘 이름이 스팍이었지. 커크는 어색하게 서서 이 쪽 우산에서 저 쪽 우산으로 건너가는 스팍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보니 천상 어린애였다. 비를 피하기 위해서라지만 아버지의 다리 쪽에 딱 붙어있는 아이를 보자니 드물게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팍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두 배 정도 되는 키를 가진 두 사람을 올려다 보았다.
"아버지, 미스터 커크십니다. 미스터 커크, 저희 아버지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렉이라 합니다."
"어, 제임스 커크입니다. 미스터 사렉."
"스팍에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커크는 예에... 하고 말을 흐렸다. 차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타십시오. 식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만."
"어, 아뇨, 저기. 제가 이미 식사를 해서요."
"캔 스파게티는 저녁 식사로 끝내기엔 영양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저 꼬맹이는 왜 저렇게 남의 생활에 관심이 많은 걸까. 확실히 반쯤 남은 캔 스파게티를 쓰레기통에 대충 처박기는 했지만 그걸 일일이 기억했다가 이럴 때 꺼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음, 제가. 소식을 하는 편이라."
"아만다가 지난 번에 요리솜씨를 칭찬 받아 무척 즐거웠다며 저녁에 '솜씨를 부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잘 먹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라고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퇴로가 전부 막혔다. 직선적이고 또렷한 두 개의 시선을 견디다가 커크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제길.
호버카는 엔진 소리는 커녕 구동하는 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움직이는 감각과도 거리가 멀어서 창문이 아니면 달려가고 있다는 것도 확인이 쉽지 않았다. 커크는 오랜만에 타는 무진동 차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커크는 좀 더 과거의 물건이 좋았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피스톨 엔진 방식의 오래된 붉은 차도, 낡고 단단한 장정을 가진 책도, 때때로는 축음기도 좋아했다. 엔진 소리를 내도록 개조한 것도 그것과 비슷한 맥락이냐고 물으면 아주 일부는 긍정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진동을 온전히 제거한 지금의 호버카에는 영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스팍."
문득 사렉이 입을 열었다. 창밖을 보며 멍하니 넋을 빼고 있던 커크는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자동 운행 시스템이 보급되면서 교통사고의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지긴 했지만 앞좌석이 위험이 더한 건 그리 변한 편이 아니라 대부분의 보호자가 앞좌석에 탔다. 따라서 지금 차 안은 앞좌석에는 사렉이, 뒷좌석에는 스팍과 커크가 앉아있는 상태가 되었다. 커크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안전벨트까지 하고 정자세로 무릎에 손을 가지런히 올리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던 스팍이 네 아버지, 하고 대답을 했다.
"오늘은 하교 시간이 평소보다 늦은 편이구나. 무슨 사유가 있었느냐."
"지구의 생물학에 관련하여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어 자료를 찾아보다 예정했던 것 보다 2.35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습니다."
"학업에 힘을 다하는 것은 분명 권장할 만한 태도이나 시각을 엄수하는 것도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
"유념하겠습니다."
영어를 참 고풍스럽게 쓰시네. 부자 간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딱딱한 감이 있었다. 벌칸이라 그런가? 커크는 숨을 죽이기 위해 노력했다. 생물학이라, 분명 자신이 없는 과목은 아니었지만 이럴 때 굳이 이야기를 꺼내서 어색한 분위기를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미스터 커크,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얘는 내 마음을 읽는 게 아닐까? 커크는 식은땀을 약간 흘렸다. 분명 벌칸이 접촉 텔레파스라고 알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접촉했다고 하기엔 거리가 꽤나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단지 읽는다고 보기엔 몇 번이나 이런 상황이 있기도 했고.
"아는 거라면, 뭐."
이어지는 질문은 정말로 커크가 어찌어찌 간신히 대답할 만한 내용들이었다. 고등학교 수업의 상한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내용들이라 나름 공부를 좋아하는 편이었고, 책도 좋아하는 편이었던 커크지만 수월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이해하는 것과 설명하는 것이 별개의 문제이기도 했고. 그래도 스팍은 나름 납득한 모양이었다. 녹초가 되어서 등을 등받이에 기대자 차가 가볍게 멈춰서는 감각이 들었다. 어느새 도착한 건지 차의 잠금쇠가 풀렸다. 스팍이 비상용인지 우산을 건네주었다. 커크는 고맙게 받아들었다.
아만다는 커크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물론 스팍이 아주 푹 젖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와야 하는 데다 식사 준비가 완료되지 않아서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사렉도 대접을 못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면서 아만다와 같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둘이 같이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금슬 좋으시네. 커크는 상당한 감동을 받으며 지난 번에 앉은 적 있는 탁자 앞 소파에 비칠비칠 걸어가 앉았다. 약간의 웃음소리와 따뜻한 색감의 불빛까지 곁들여지니 정말 그럴 듯한 드라마 속의 집이었다. 밖에서 비오는 소리가 단조롭게 울렸다.
잠깐 졸았는지 정신을 차리자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벌칸 꼬맹이가 2층에서 아랫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커크는 가볍게 인사를 하듯이 손을 올렸다. 스팍은 그걸 흘끗 보고는 쫑쫑 내려와 커크의 앞에 섰다. 앉은키와 선키가 비슷해서 눈이 마주쳤다. 방금 따뜻한 물에 씻고 와서인지 예쁜 녹색으로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3D체스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어?"
웬 삼 차원 체스? 일단 할 줄은 알았으므로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팍은 그 동작을 받아 뒤로 돌아 장식장 한 켠에서 삼차원 체스 말과 판을 꺼내왔다. 테이블 가득히 체스판이 펼쳐졌다. 커크가 백을 잡았다. 말을 늘어놓으면서 스팍이 입을 열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으로 예상 됩니다. 제가 할 줄 아는 유희의 종류는 삼 차원 체스 외에는 마땅치 않으므로 권하였습니다."
"어어."
그래서였군. 스팍이 아까보다 조금 더 귀엽게 느껴지는 것 같아 커크는 속으로 살짝 침음을 흘렸다.
판이 반 정도 지나자 저녁 식사를 하러 오라는 이야기가 부엌에서 들렸다. 막 스팍의 비숍을 따낸 커크는 어쩐지 부루퉁해 보이는 스팍을 보고 웃으며 식당을 향했다.
저녁 식사는 푸짐했다. 음식을 아예 종류를 나누어 준비한 건지 식탁은 크게 녹색과 그렇지 않은 음식으로 양분 되어 있었다. 커크와 아만다의 것은 소고기가 약간 들어간 크림 수프였고, 스팍과 사렉의 것은 그들의 말에 따르면 플로믹 수프라고 했다. 애피타이저에도 닭고기가 들어있나, 들어있지 않나로 구분이 되었고 메인 디쉬는 연어와 두부로 나뉘었다. 벌칸은 아예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 안 하는 걸까? 참견할 건 아니었지만 애매하긴 했다. 일단 고기다 보니 혼자만 맛있는 걸 먹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약간은 있었다. 디저트로 나온 과일을 먹는데 접시를 정리한다며 잠시 들어갔던 아만다가 걱정스런 투로 이야기했다.
"예상은 했지만 비가 통 그치질 않네요. 괜찮아요?"
"예? 아, 괜찮습니다."
비 오는 걸 예상 못 한 것도 아니고, 무인 택시를 부르면 어떻게든 될 것이었다. 프로그래밍 공식을 몇 더 팔아볼까. 바나나를 우물우물 먹고 있는데 사렉이 나직하게 스팍을 불렀다.
"스팍."
"네 아버지."
"부탁한단다 스팍."
스팍이 의자 아래로 내려 서자 아만다도 부탁한다며 말을 건넸다. 무슨 심부름이라도 하나? 커크는 바나나를 삼켰다. 사렉이 말을 걸었다.
"35.6일 가량 사용되지 않았지만 사용하는 데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예?"
"손님방 말이에요."
아만다가 사렉을 대신하듯이 웃었다. 스팍이 커크의 옆에 섰다. 커크는 포크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 힘을 써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