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팍커크]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
2015년 글 백업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실제 인물, 사건, 단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캐리(@carrymint)님의 생일 축하 글입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드려요!
은백색과 유백색의 경계를 넘나드는 광택을 띤 복도는 분명 현대 기술의 총 집약체일지는 모르지만 미의식과의 거리는 얼마만큼인지 가늠하기도 힘들다는 것이 대다수 인테리어 전문가들의 평이다. 물론 우주 정거장의 특성상 인테리어 전문가들이 관여할 일은 거의 없고, 때로는 스크린을 통해 비추는 우주의 풍경은 다른 말을 보탤 것 없이 그것 만으로도 황홀하게 아름답지만 : 안타깝게도 인간은 항시 변화를 추구하는 존대다. 그 오묘한 색감이 예쁘지 않냐면, 그것에는 부정의 말을 표시할 수 있으나, 문제는 그 오묘한 색감과 어울리게 장식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우주정거장에 멈췄다 가는 모든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는, 사람 조차도. 따라서 손님을 접대하거나, 응대하는 공간인 응접실, 연회장 : 가장 사사로이는 여행자와 상주인 모두를 대상으로 운영하는 술집까지, 대다수의 사적인(?) 공간의 꾸밈새는 그 벽을 덮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장 유명한 바bar인 유산legacy조차도 그 범주에서는 벗어나지 못해 두꺼운 태피스트리가 사면을 장식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름이 저렇게 애매해게 지어진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집의 1대 사장이 대대손손 물려가며 장사를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며, 다행히 아직까지 그 믿음은 깨지지 않고 보존되어 오고 있었다. 3대 주인은 자라면서 한 번도 자신이 주인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덕택에 약간 과묵하지만 그 외에는 바의 주인으로써 나무랄 데가 전혀 없다는 평조차 듣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날도 그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다하고 있었다. 그 날은, 오히려 편한 날이었다. 불특정다수가 불특정하게 출입하는 일이 당연한 바bar를 무려 전세내는 대범한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의 몇 명은 단골이었으니 그럴법도 하지만, 몇 명은 처음 보는 얼굴들로 여행객인 듯 싶었다.
단골 손님 중의 하나는 여러모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었다. 성별조차 불분명한 그는, 특별히 공격적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긴 했지만, 어딘가의 귀족 또는 왕족인지 마음에 드는 사람마다 추파를 던지며 유혹하기를 좋아했다. 게다가 거절하면 모독을 당했다며 화를 내고 돌아가 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번 분위기가 깨지면 다시 회복하는 데에도 또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매상에는 나름 지장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약간 쉬쉬하는 태도로 그를 대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오늘의 파티는 그를 위해 이루어진 것인 모양이었다.
각자 담소를 즐기는 것 같았지만 참석자들의 면면은 그를 위시해 둘러 다니던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여행객들이었는데, 여행객들은 각자 파티를 즐기다가도 파티의 주빈-혹은 주인인듯한 사람을 잠시 곁눈질했다가 다시 즐기는 것으로 돌아오길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주빈의 모습은 상당히 화려했다. 옷차림은 화려하다기 보다는 금욕적이고 수수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단체의 유니폼인지 입고 있기가 약간은 불편해 보였으나 안 어울린다고는 표현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래, 외모가 화려해서인지 더 잘 어울리는 감이 있었다.
머리는 더티 블론드였지만 더티라고 하기엔 색이 예쁘게 뽑혀 있었다. 물론 염색일 수 있겠으나, 중간중간 섞인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등을 보면 그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다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잡티도 그리 보이지 않는 피부와, 특히 새파랗게 빛나는-별들 사이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색의 눈동자는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받아넘기기 어려운 추파도-여기서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웃는 얼굴로 유들유들하게 넘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사교성 또한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전형적인, 미워할 수 없는 개구쟁이, 혹은 약간 나쁜 남자 상이었다. 아무래도 주빈이 아니라 주인인 모양인데. 데킬라 선라이즈를 바에 내려놓고 서빙을 하고 난 주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딸랑딸랑. 고전식으로 문에 달아놓은 방울이 울렸다. 주인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티의 주인인 남자와 같은 복장을 한 또다른 남자 하나가 들어오고 있었다. 복장이 다르다면, 파티의 주인은 모자가 없었는데 이번에 온 손님은 모자까지 빳빳이 다려 쓴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문 근처에 서 있던 여행객이 급하게 몸을 빳빳이 세우고 경례를 올렸다. 남자가 흠잡을 데 없는 열중쉬어 자세로 경례를 받아주고 뭐라 말하자 고개를 두어번 끄덕인 여행객이 그제서야 풀어졌다. 높으신 분인 듯 싶었다.
똑똑. 바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바의 주인은 고개를 돌리며 습관적으로 어구를 말했다. 아까 나름 흥미롭게 지켜보던 파티의 주인이 앞에 서 있었다. 남자의 눈은 가까이서 볼 때 생각보다 더 색이 파랬다. 남자의 입술이 달싹였다.
"준벅 부탁드려요. 마마는 뭘 드시겠습니까?"
그제야 눈치챈 거지만- 단골 손님은 주인의 팔에 거의 일방적으로 팔짱을 끼고 거의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애교를 부리려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애교로 보아줄 만큼 적당히 몸무게를 실은 게 아니어서 바의 주인은 파티 주인의 어깨가 빠지는 게 아닌지 약간 걱정을 했다. 다 쓸데 없는 걱정이었지만.
"섹스 온더 비치 부탁하오."
너무나 노골적인 워딩이었지만 두 주인의 얼굴은 태연했다. 파티의 주인은 깔루아 밀크도 한 잔 더 부탁한다며 넘겨버렸고, 바의 주인은 평소 그랬듯이 아무렇지 않게 온스잔을 꺼내들었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기분이 상하고 있는지 약간 샐쭉해진 얼굴로 주빈은 입술을 뒤틀었다. 파티의 주인은 이런 일이 능숙한지 다른 가벼운 화제를 꺼내서 말을 돌려버렸다.
주인의 화제는 전 우주를 총 망라하고 있었다. 반평생을 이 일을 하면서 우주정거장을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주워들은 것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의 주인에게 있어서도 놀라울 수준이었다. 주도권을 주었다 뺐는 완급 조절도 능란해서 준 벅을 내며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즈음이었다.
"함장님."
보드카 다음으로 주스 종류를 재고 있는데 처음 듣는 목소리가 말 사이를 파고 들었다. 한결 더 낮고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였다. 스팍! 파티의 주인이 거의 탄성을 지르며 그를 맞이했다. 아까 파티 중간에 들어온 그 남자였다.
스팍이라 불린 남자는, 모자를 써서 가렸던 얼굴이 생각보다 많이 준수했다. 피부는 약간 창백해 보였지만 코도 우뚝했고,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침착해 보이는 얼굴도 상당한 이점이 되는 요소였다. 게다가 가까이에서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살짝 뾰족한 귀는 벌칸이라는 뜻이었다. 옆에서 구경하긴 참 재미있는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함장-그러니까, 파티의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빈과 스팍이라는 남자를 서로 소개시켜 주었다.
"마마, 이쪽은 저희 함선의 부함장, 스팍이라 합니다. 스팍, 이 쪽은 아리아뒤엘의 민달 마마."
"처음 뵙겠습니다, 마마."
부함장이 짧은 목례와 함께 인사를 건네자 단골 손님은 품평하듯 위 아래로 상대방을 쓱 훑고, 방긋 웃어보였다.
"처음 뵙겠소이다. 이름이 스팍이라 하였던가?"
주빈이 손을 들자 바의 주인은 쉐이커 뚜껑을 덮다가 잠시 멈칫했다. 추파를 던지겠다는 신호였다. 싸움은 물론 원치 않는 것이지만,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방적인 치정은 더더욱 싫은 일이 아닐 수 없었디. 분위기도 수습 되지 않을 것이 뻔히 보이기도 했고. 단골의 추파는: 상대방의 상의 아랫자락을 말아 쥐는 것으로 시작을 하는데, 덕분에 많은 사람이 기겁을 하기 때문이었다. 손이 어찌나 빠른지, 보통은 잡힌 다음에야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하곤 했다. 아마 이번에도 별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단골이 헛손질을 했다. 부함장은 딱 반 걸음 뒤로 물러서 있었다. 단골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부함장을 바라보았다. 부함장은 침착하고 덤덤한, 아니 그냥 무표정으로 차분히 이야기했다.
"벌칸은 접촉 텔레파서이기 때문에, 정신을 의도치 않은 침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무례를 양해해 주시길 바랄 따름입니다."
"그렇, 소이까."
소유격이 애매한 문장이었다. 그렇지만 납득할 수 밖에 없는 문장이기도 해서 단골이 어색하게 손등을 슬슬 쓸면서 손을 거두자 주인-함장은 다시 자리에 앉으려 했다. 부함장에게 제 옆자리를 권하는 친절까지 보이면서. 함장님, 부함장이 한 번 더 주인을 불렀다.
"어? 왜?"
"방금 파이크 제독님으로부터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우주력으로 23시 07분, 앞으로 약 9.3분 후에 통신을 요청하셨습니다만."
"맙소사."
함장이 약간 앓는 소리를 냈다. 파티의 주인이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것도 주빈을 두고. 한껏 샐쭉해진 단골을 난처하게 보다 함장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통신이 끝나는 대로 즉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느정도 면이 선다고 생각했는지 단골은 곁눈으로 흘끗 함장을 바라보곤 손을 위 아래로 팔락팔락 저었다. 함장은 그제야 허리를 펴고 뒤돌아 나가려 했다. 함장님, 하고 또 한 번 부함장이 붙들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또 왜?"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하십니다. 스타플릿 내규는 둘째로 치부하더라도 예의에 알맞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부함장은 손수 함장의 옷차림을 정돈했다. 약간 구겨진 자켓의 매무새나, 살짝 튀어나온 셔츠 자락이나, 느슨해진 목깃, 심지어 어깨에 붙은 실밥을 '손바닥으로' 털어주기까지 했다. 방금 전에는 접촉 텔레파시 때문에 접촉을 피한다고 하지 않았나? 섹스 온더 비치를 내면서 주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주빈도 생각이 비슷했는지 얼굴이 약간 떨떠름해져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말끔한 상태가 된 함장이 급히 문 밖으로 나가는 것까지 지켜보고 나서 부함장은 뒤꿈치로, 정확히 90도를 돌아 다시 단골을 마주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함장님을 대신해 제가 잠시 말동무를 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말투로 보자면, 그 일을 해야한다는 게 아주 싫고 지루해 죽을 것 같다는 듯한 뉘앙스가 아주 옅게 풍겼지만 표정만은 그린듯한 무표정이었다. 아까보다도 떫은 표정으로 주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부함장은 감사드린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잠시의 침묵을 두었다가 주빈이 약간 새침하게 말을 꺼냈다.
"커크 함장과는 많이 친한 편인가 보오."
"발화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만,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단골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함장과는 상당히 친밀한 접촉을 하는 것으로 보이었는데."
부함장은 대답이 없었다.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 맙소사, 표정이 읽혔다. 아까부터 초지일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뭔가 알 수 없는 것에 한해서는 그래도 표정을 드러내는 모양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에는 심지어 가식이나 꾸밈조차 없었다. 견해를 더 이야기 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재차 묻기까지 했다. 단골의 표정이 점점 더 기막힌 것으로 변했다. 주인은 볼 안쪽을 조금 사려물어야 했다.
"깔루아 밀크입니다."
부함장이 앉은 자리는 본디 함장이 앉아 있었던 자리였으므로, 주인은 그 자리에 칵테일을 놓았다. 잠시 역원기둥 형의 잔을 바라보다, 부함장이 물었다. 자당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에게는 무리겠군요. 함장님이 주문하신 것인 듯 하니 남겨두어도 괜찮겠습니까."
"편하실 대로. 따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아뇨."
달칵, 하고 부함장의 손끝에 뭔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두 잔을 주문하신 걸 보니 이게 제 몫인듯 합니다. 부함장이 집어 든 것은 아까 함장이 한 모금을 마신 준 벅이었다. 주빈이 노성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부함장이 아까의 그 모르겠다는 표정 그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주인은 또 한번 입 안을 깨물어야 했다.